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청색 작전 (문단 편집) === [[천왕성 작전]]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스탈린그라드 전투, 문단=7.1)] [[파일:attachment/Operation_URANUS.jpg]] [[파일:external/c2fbf087733051ca87c04bf0a1e588388b53c63eaf02c5cea62be6ee16bca108.jpg|width=75%]] > 남서쪽 전선에서의 공격은 19일날 시작됐죠. 우리는 20일날 출발했습니다[* 돈 강 방면군 소속으로 보인다.]. 공격준비 포격이 끝났을때, 나는 참호 밖으로 뛰쳐 나갔어요. 뒤를 돌아보니, 오 이렇게 좋을 수가! 전차가 일직선으로 다가오고 있었죠. 나는 탱크를 보자 머리카락이 곤두섰어요. 나는 그때까지 떼거지로 몰려오는 탱크들을 본적이 없었거든요. 나는 생각했죠. '젠장!' 나는 우리가 전진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난 독일군 전차가 우리 뒤를 따라오는 것 같았죠.[* 전차라고는 독일군 전차밖에 본적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내 생각에 우리 소비에트가 그렇게 많은 탱크를 가져본 적은 없었어요.....[* 이 지점에서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차 운용 방식 차이를 알 수 있다. 사실 소련군의 전차 총계는 항상 독일군보다 많았다. 문제는 그것을 모아 집단적으로 운용한 적이 없어, 독일군 전차는 그때까지 소련군 전차와 전투에서 수적 우세를 지닐 수 밖에 없었다.][br]루마니아군과 헝가리군이 우리 앞쪽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계속 전진했어요. 따라오던 전차들은 제 역할을 해주었어요. 아침에 우리는 Abganerovo에 도착했습니다. 우리 전차들이 쑥대밭을 만들어논 후였죠. - 천왕성 작전에 참가한 알렉세이 필리포비치 쿠즈네초프 (Aleksey Filippovich Kuznetsov)의 증언 스탈린그라드 시내에서 처절한 전투가 계속되던 1942년 가을의 어느날,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크레믈린에서 열린 [[스타프카]] 회의에서 이런 축차적인 병력 투입으로는 방어가 한계일 뿐 독일군을 격퇴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둘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스탈린]]은 두 눈을 반짝이며 "그럼 무슨 다른 좋은 수가 있단 말인가?"라고 되물었고, 두 장군들은 며칠안에 다른 방안을 찾아오겠다고 스탈린에게 대답했다. 며칠후 소련군의 총참모부에서 여러 참모들이 세부 논의 끝에 확정한 작전안은 그동안의 소극적인 수비를 떠나 따라서 대규모의 공세를 통해 B집단군에게 타격을 가하고 남부 러시아 전선의 전세를 뒤집는다는 계획이었다.[* 대략적인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니콜라이 바투틴]] 중장이라고 알려져 있다.]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원수는 독일 6군의 좌익과 우익이 장비도 변변찮고 싸울 의지도 별로 없는 루마니아군에 의해 방어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총군부사령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와 작전을 의논했다.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스탈린의 승인을 얻어 독일 6군을 스탈린그라드 시내에 붙잡아두고 양 측면으로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돈 전선군과 [[니콜라이 바투틴]]의 남서 전선군의 협격을 통하여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을 포위하는 골자의 [[천왕성]] 작전을 입안했다. 이에 따라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던 볼가강 교두보에는 최소한의 방어만 가능한 수준의 병력 보충을 했고 스탈린그라드 북서쪽과 서남쪽에 대규모의 병력을 집결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에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모든 명령은 구두로 전달되었으며, 무선이나 문서를 사용한 명령은 금지되었다. 그리고 11월 10일, 소련군은 5개 야전군 규모의 대병력의 집결을 완료했다. 이렇게 집결한 병력은 90만에 가까운 대병력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